한국 민주주의 응원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96세로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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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익 · 손재권 2022.09.08 11:47 PDT
한국 민주주의 응원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96세로 서거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출처 : Gettyimages)

왕위 계승은 찰스 3세
영국의 상징이자 영국인의 정신적 지주
2차 세계대전, 냉전, 공산권 붕괴,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살아있는 역사
한국 방문 및 한국 노무현 대통령 국빈 초대 "재임 초기 겪은 한국전쟁, 아직 분단 극복못해 아쉬워"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96·본명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이 8일 오후(현지시각) 서거했다.

영국 왕실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있는 밸모럴성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뉴욕타임스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사망 당시 왕위 계승 서열 1위 찰스 왕세자(장남)와 부인 콘월 공작부인(카밀라), 왕위 계승 서열 2위 윌리엄 왕세손 등이 여왕 곁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영국 BBC 방송은 앞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건강 상태가 악화해 주치의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여왕의 건강 상태 악화 소식에 영국 왕실 가족들은 여왕이 머물고 있는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으로 급히 모였다. 건강하던 여왕은 지난해 4월, 70년 해로한 남편 필립공을 떠나보낸 뒤 급격히 쇠약해졌다.

작년 10월에는 하루 입원을 했고 올해 초에는 코로나19에 감염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6일 리즈 트러스 새 총리가 스코틀랜드 밸모럴에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접견했을 때 비교적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 지 이틀 만에 서거하게 돼 충격을 더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영국 왕실
엘리자베스 2세와 왕실 타임라인 (출처 : Gettyimages, 그래픽: 김현지)

왕위 계승은 누가?

영국 왕실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로 서거 함에 따라 1순위 왕위 계승권자인 장남 찰스 왕세자가 영국의 새로운 군주가 됐다고 밝혔다. 그의 왕명은 '찰스 3세(Charles III)’ 로 정해졌다.

그는 애도 성명을 통해 “친애하는 나의 어머니, 여왕의 서거는 나와 가족 구성원들에게 가장 슬픈 순간이다. 우리는 소중한 군주이자 사랑받았던 어머니의 서거를 깊이 애도한다”고 밝혔다.

찰스 3세 국왕은 1948년생으로 올해 74세. 3살 나이에 왕세자가 된 이후 70여년을 왕위 예정자 신분으로 살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25살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70년간 재위한 결과 찰스 3세는 역대 영국 국왕 중 가장 늦은 나이에 즉위한 왕이 됐다.

그는 1981년 다이애나 스펜서와 결혼,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 등 두 아들을 뒀다. 그러나 결혼 이후에도 '연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잊지 못했고 왕실 내외에서 계속 불륜을 이어갔다. 다이애나비는 결혼 직후부터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해야 했고 결국 1996년 찰스 3세와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이혼했다. 찰스 3세와 카밀라의 불륜은 언론에 그대로 공개 돼 대중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혼 후 1년 만인 1997년 다이애나비가 프랑스 파리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여론이 더욱 악화 돼 근대 영국 왕실의 큰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찰스 3세는 결국 2005년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재혼했다(재혼 후 카밀라는 콘월 부인 호칭을 받음).

찰스 3세는 근대 영국 역사에서 가장 인기없는 왕위 계승자다. 때문에 영국 내에서는 윌리엄 왕세손에게 바로 왕위를 넘겨줘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또 어머니와 달리 왕세자 시절 개인의 정치적인 견해를 종종 표명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영국인들이 여전히 '왕정'을 지지하지만 왕실의 역할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 찰스 3세이기 때문에 향후 국왕의 역할에 대해 논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왜 인기 있었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의 상징이자 영국인의 정신적 지주였다. 모든 영국인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1952년 25세에 선왕 조지 6세에 이어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는 2차대전 이후 격동의 시기에 강건한 모습으로 통합과 안정을 이끌어온 여왕으로 평가된다. 합리적인 사고와 온화함으로 재위 기간 중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는 국가 원수였다.

이날까지 만 70년 127일을 재위, 영국 군주 중 최장기간 재임한 군주로 기록됐다. 세계 역사를 봐도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 통치한 군주다.

현재 영국 외에도 호주, 캐나다, 자메이카 등 14개 왕국의 여왕이자 54개 국가로 이뤄진 커먼웰스(영연방)의 수장이다. 영국은 인구 6700만명에 불과하지만 영연방은 약 25억명으로 세계 인구의 30%에 달한다.

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를 다룬 넷플릭스 시리즈 '더크라운'의 한장면 (출처 : 넷플릭스)

킹스 스피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 그의 부친은 선대 왕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 후계 서열 1위 왕세자는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였다.

하지만 에드워드 8세는 즉위 직후, 미국의 평민 출신 이혼녀 월러스 심프슨 부인과 사랑에 빠지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왕위를 던져 버리고 사랑을 찾아갔다.

이에 따라 에드워드 8세의 동생인 '조지 6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의 나이 10세에 승계 서열 3위에서 1위로 올라서게 됐다.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지켰다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위 승계 위치에 이르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아버지 '조지 6세'는 심한 말더듬증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왕위를 굳건히 지켜 나치 독일과의 2차 대전을 극적인 승리로 이끌었다. 조지 6세는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암으로 급작스레 사망했다. 남편 필립공과 영연방국인 아프리카 케냐를 방문 중이던 25세의 엘리자베스 2세는 예상보다 일찍 즉위하게 됐다. 이를 주제로 한 영화가 바로 '킹스 스피치'다.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은 BBC 최초로 TV 생중계 됐으며 전세계 2500만명이 지켜본 '세계적 미디어 이벤트'로 기록됐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의 즉위와 말더듬이었던 핸디캡 그리고 전쟁 당시 상황을 그린 영화 킹스 스피치

군림하되 통치 하지 않는다

그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 군주제의 원칙에 따라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1955년), 마거릿 대처(1979년), 존 메이저(1990년), 토니 블레어(1997년), 고든 브라운(2007년), 데이비드 캐머런(2010년), 테레사 메이(2016년), 보리스 존슨(2019년), 리즈 트러스(2022년) 등 영국 총리 15명을 거쳤다. 이 같은 엘리자베스 2세의 통합적 사고는 어려운 시기에 영국 내 정치적, 정서적 안정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12년 즉위 60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국왕’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는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제치고 1위에 올랐으며 지난 6월 즉위 70주년 기념 플래티넘 주빌리가 전국에서 성대하게 치러질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영국 안정의 등대(Britain’s Beacon of Stability)’라고 묘사했다.

살아 있는 역사

그는 재위 기간 중 2차 세계대전, 냉전, 공산권 붕괴, 코로나 팬데믹 등 격동의 세계 변화를 겪었다. 격동의 시기에 영국 왕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합리적 사고와 정치에 중립적인 태도, 온화한 성격으로 영국 국민들 사이에 큰 지지를 얻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이 급부상하고 영국 식민지의 잇단 독립으로 수세기 이어진 찬란했던 '대영제국'의 위상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영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가장 큰 '사건'은 열세살이던 1939년 벌어진 2차 세계 대전이었다. 아버지 조지 6세와 총리의 "캐나다로 대피하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영국을 지켜 '민심'을 얻었다.

1952년 여왕 즉위한 이후 1965년엔 전격적으로 서독을 방문하면서 2차 대전의 앙금이 깊게 남아 있었던 '영국과 독일'이 공식 화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영국의 영향력이 줄어든 계기가 됐던 유럽연합 창설(1993년) 및 브렉시트(2016년), '대영제국'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이벤트였던 홍콩 반환(1997년) 등을 지켜보며 제국의 끝을 지킨 군주였다. 2011년엔 아일랜드 공화국을 공식 방문(아일랜드를 방문한 최초의 영국 군주)하면서 오랜 전쟁의 역사를 지닌 양국을 화해시키기도 했다.

해리 트루먼부터 조 바이든까지 재위기간 중 미국 대통령 13명을 만났고 중국 등 세계 100여개국을 방문했다. 그가 해외를 방문할 때 마다 해당 국가에서는 '국빈'으로 초대 돼 '영국 붐' '엘리자베스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왕의 재외 기간과 영국, 독일, 미국, 한국 등 대통령(총리) 등 행정부 수반의 재임을 비교한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한국의 민주주의를 응원한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임 기간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같다.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 (~1965년) 부터 윤석열 대통령(2022년~)까지 여왕의 시대에 집권한 대통령이다. 한국 대통령 중에는 모두 5명(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박근혜)이 영국 방문시 여왕을 만났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영국과 인연이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 패배 후 전격 정계은퇴를 선언,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대통령이 되면서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공식 초대했다.

엘리자베스 2세 내외는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1883년 두나라가 수교(한영 우호통상항해조약)한 이래 영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 방문한 것이다. 여왕은 한국의 미동 초등학교, 이화여대, 인사동, 안동 하회마을 등을 방문했으며 안동에서는 73세 생일상을 받았다.

여왕의 방문은 한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한국과 영국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전환을 갖게 했다.

영국은 역사적으로 아시아 지역 중에서는 인도, 중국, 일본과 식민지 및 전쟁 등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영국은 '제국주의' 시대 아시아의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기 때문에 한국은 아시아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과 비중이 적었다.

하지만 유력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의회 민주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향하고(1992년) 이후 대통령에 당선(1997년)이 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영국도 1997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정책이 친노동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여왕의 하회마을 방문이 영국 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여왕은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마련한 국빈만찬의 답사에서 “오늘 보는 한국은 제가 왕위에 오른 1952년 당시 영국민이 알고 있던 한국과 많이 다르다. 한국인은 산산조각이 난 나라를 다시 세우고 세계 주요 산업국가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고 언급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인상적인 한국 방문에 대한 기억을 받고 한국의 대통령을 버킹검 궁으로 '국빈' 초청했으며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초대를 받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10년새 두 차례나 국빈으로 초대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73세 생일상을 받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출처 : 자료 사진)

특히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한국의 방문단을 맞이한 여왕은 만찬사에서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 한국민이 다시 한번 통일을 이룩해 평화를 누리면서 번영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또 "내가 즉위할 당시 한국은 전쟁 중이었으며 분단을 종식시키지 못한 그 끔찍한 전쟁에 참전하고 전몰한 모든 사람들을 기억한다"며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대로 영국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 (출처 : 노무현 대통령 사료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차를 타고 여왕과 함께[ 버킹검 궁으로 향하고 있다. (출처 : 노무현 대통령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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