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우리는 왜 아이에게 ‘마찰’과 ‘힘듦’을 되돌려줘야 하는가?
AI와 스마트폰이 문제 해결의 ‘마찰’을 제거하면서, 아이들의 사고력·집중력·회복탄력성 약화
‘편리함 중심 양육’ ... 장기적으로 도전·실패·지연을 견디는 능력을 약화 우려
AI 시대 교육의 핵심... 더 많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마찰과 힘듦’을 설계하는 것
기술의 최종 목표는 사용자의 삶에서 마찰(friction)을 제거하는 것이다. 자동차, 자동문,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가 그렇게 발명됐다. 인간의 본능은 마찰이 사라질수록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그 도구들은 결국 인류 보편의 이기(利器)가 됐다.
마찰 제거에는 공통점이 있다. 줄어든 것은 '신체적 수고'였다. 자동차가 다리의 수고를 덜어준 대신, 우리는 더 먼 곳의 사람을 만나러 갈 수 있게 됐다. 엘리베이터가 계단의 수고를 덜어준 덕분에 도시는 위로 자랄 수 있었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컸기에, 우리는 그 발명들을 진보라 불렀다.
AI도 인류 보편의 이기가 되고 있다. 한 번의 클릭, 한 번의 음성 명령, 한 번의 프롬프트로 결과가 도착하기 때문이다. 검색하느라 헤매지 않아도 되고, 글쓰기 앞에서 막막하지 않아도 되고, 어색한 첫 대화의 불편함도 견디지 않아도 된다.
AI 기업들의 프론티어 모델 개발에도 우리가 자동차와 엘리베이터에서 익혔던 '마찰 제거 = 진보'라는 본능적 등식 AI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줄어드는 자리에 풍부함이 들어차는 것이 아니라, 줄어드는 자리만큼 인간이 비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6년 3월 텍사스 오스틴 SXSW EDU 무대에서 예일대 행복심리학자 로리 산토스(Laurie Santos) 교수와 미국 최대 아동·미디어 옹호단체 커먼센스 미디어(Common Sense Media)의 브루스 리드(Bruce Reed) AI 책임자가 토론을 통해 AI 시대의 교육에 대해 깊은 인사이트를 전달했다.
두 사람이 던진 질문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서 '건강한 마찰'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글의 목차]
1. AI는 인류 역사상 어떤 기술보다도 아이들의 성장 방식을 가장 크게 바꿀 것
2. AI는 인간이 충돌하며 나오는 성찰과 배움의 기회를 없앨 수 있다
3. 행복까지 아웃소싱된다
4. AI 시대 양육법은? 가드레일은?
5. 필연이 아니다 : 희망은 행동을 통해서만 발현된다
👉 더밀크의 시각 : 마찰을 다시 설계하라
로리 산토스(Laurie Santos)는 예일대 심리학과 찬드리카·란잔 탠던 석좌교수이자 비교인지연구소 소장이다. 하버드대에서 영장류 인지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진화심리학자로, 인간 마음의 진화적 기원을 30년 가까이 추적해왔다. 그녀가 만든 강의 '심리학과 좋은 삶(Psychology and the Good Life)'은 예일대 300년 역사상 가장 많은 수강생을 모은 강의가 됐고, 팟캐스트 '해피니스 랩(The Happiness Lab)'은 누적 1억 회 다운로드를 기록한 글로벌 행복심리학의 대표 권위자다.
브루스 리드(Bruce Reed)는 미국 최대 아동·미디어 옹호단체 커먼센스 미디어(Common Sense Media)의 AI 책임자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백악관 국내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 1996년 복지개혁법을 주도하고, 조 바이든 부통령의 비서실장과 바이든 대통령 임기의 정책 담당 비서실 차장을 역임한 30년 경력의 정책 설계자다. 2025년 타임지(誌) 'AI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1. AI는 인류 역사상 어떤 기술보다도 아이들의 성장 방식을 가장 크게 바꿀 것
1-1. 2017년의 휴대폰, 2026년의 인공지능
심리학자 진 트웬지(Jean Twenge)는 지난 2017년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에 '스마트폰이 한 세대를 망가뜨렸는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그 이후 거의 10년 동안 학소셜미디어가 청소년의 정신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두고 씨름해왔다. 산토스 교수는 이날 토론에서 "2026년 현재 우리가 마주한 위협은 그 시절보다 훨씬 거대하다"고 진단했다.
2017년의 위협이 '앱과 알고리즘'이었다면, 2026년의 위협은 '초개인화된 인공지능'이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에게 무엇을 더 보여줄지를 골라줬다면, AI는 사용자가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준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를, 완성된 에세이를, 절대 반박하지 않는 대화 상대를 만들어 건넨다.
커먼센스 미디어의 '키즈 센서스(Kids Census)' 조사 결과(The Common Sense Census: Media Use by Kids Zero to Eight)에 따르면 미국 두 살 아이의 40%가 자신의 태블릿을 가지고 있다. 여덟 살의 4분의 1은 자기 휴대폰을 쥐고 있다. 두 살 미만 아이의 평균 화면 시간은 하루 1시간, 다섯 살부터 여덟 살은 하루 3시간 30분에 이른다.
0세부터 8세까지의 평균 일일 스크린 타임은 2시간 30분. 리드는 "오늘날 아이들은 태어난 첫날부터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표현했다.
1-2. 기회비용 : 화면 너머에서 잃어버리는 것들
이 숫자가 말하는 진짜 위협은 화면 안에 있지 않다. 화면 바깥에 있다. 리드가 거듭 강조한 단어는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다.
브루스 리드 AI 책임자는 "우리는 이제 PC, 스마트폰, 게임기 등과 함께 산 지 20~30년이 됐다. 하지만 기회비용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기회비용'이란 부모들이 디지털 기기에 자녀들에게 시간을 맡기는 동안 책을 읽거나, 자기만의 게임을 만들거나, 그냥 흙장난을 하거나 하는 시간이다.
리드는 이어 "0세에서 8세 아이들이 디지털 디바이스 앞에서 보내는 그 하루 두 시간 반을, 부모들 또한 자신의 디지털 중독을 채우며 똑같이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고 일갈했다.
산토스 교수는 기회비용을 심리학자의 시선으로 분해했다. 그는 "부모들도 무심코 디지털 기기를 자녀들에 건낸다. 하지만 아이는 자기 자신의 지루함, 자신의 호기심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스스로 알아낼 기회를 잃고 있다"고 말했다.
0세에서 8세 사이는 아이가 지루함, 호기심, 불확실함, 막막함을 스스로 견디고 처리하는 능력, 즉 감정조절 능력을 익히는 결정적 시기다. 그런데 부모가 화면을 손에 쥐여주는 순간, 아이는 그 감정과 마주하는 훈련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는 몇 년 뒤 가정에서, 교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1-3. 청소년의 시간은 이미 AI에 점령됐다
청소년은 디지털에 더욱 중독 돼 있다. 커먼센스 미디어 조사에 따르면 미국 10대는 하루 평균 4시간 30분을 휴대폰에 쓴다. 학교 수업 시간 안에서만 평균 43분이며, 6시간을 쓰는 아이도 드물지 않다. 청소년은 휴대폰을 하루 100번 집어 들고, 알림을 200번 받는다.
미국 전(前) 공중보건위생국장 비벡 머시(Vivek Murthy)는 보고서에서 하루 3시간 이상 소셜미디어를 쓰면 우울·불안 위험이 두 배로 높아진다고 경고했다. 평균이 4시간 30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거의 모든 청소년이 위험군에 속해 있다.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은 이 현상을 '프로덕트 트랩(product trap)'이라 명명했다. 산토스 교수가 인용한 그의 분석은 정교하다.
'프로덕트 트랩'이란 사람들에게 "소셜미디어를 쓰기 위해 얼마를 지불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으면 거의 아무도 돈을 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셜미디어를 끊는 대가로 얼마를 받아야 하느냐"고 묻는 순간 큰 액수가 나온다.
"소셜미디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살기 위해 얼마를 낼 수 있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낸다. 개인 차원에서는 이 제품이 자신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두가 쓰기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이론이다. 이것이 함정의 구조다.
실제 11세에서 15세 사이 여학생의 3분의 1이 자신을 중독으로 인식하고 있고, 10대의 4분의 3이 알고리즘에 조종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가정이 밤 9시 이후 휴대폰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 그것보다 아이에게 더 좋은 일은 없다브루스 리드, 커먼센스 미디어 AI 책임자
2. AI는 인간이 충돌하며 나오는 성찰과 배움의 기회를 없앨 수 있다
아동 및 청소년의 스마트폰 중독에 대해선 연구 결과가 많다. AI는 이제 시작이다. 아직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이 분야에서 30년간 연구하고 미 백악관에서 정부 정책을 설계한 브루스 리드의 분석은 설득력을 가진다.
2-1. AI는 소셜미디어의 문제를 증폭시킨다
브루스 리드 AI 책임자는 "AI는 소셜미디어를 더 강력하게 만든다. AI는 사용자가 무엇을 더 원하는지를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소셜미디어가 가진 메커니즘이 AI에 의해 더 정교하게 무기화(weaponized)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날 토론에서 리드는 마크 저커버그 메타 창업자 겸 CEO의 한 발언을 인용하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리드는 바이든 정부 시절 저커버그 등 빅테크 기업의 CEO를 직접 상대하며 정책을 수립한 바 있다.
저커버그는 한 팟캐스트에서 "평균적인 미국인이 행복하려면 친구가 15명 필요한데 실제로는 3명뿐이니, 12명의 AI 친구를 공급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2-2. 마찰있어야 성장한다 (만약 마찰이 없다면...)
여기서 마찰의 역설이 드러난다. 현실의 인간 관계에는 마찰이 기본이다. 친구는 의견이 다르고, 가끔 약속을 어기고, 내 모든 말에 동의해주지 않는다. 그 마찰이 불편하지만, 마찰을 통과하면서 인간은 갈등 조율 능력과 공감의 근육을 키운다. 하지만 AI 컴패니언은 그 마찰을 0으로 만든다. 사용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톤으로 들려준다. 매끈하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커먼센스 미디어는 'AI 컴패니언 챗봇'이 18세 미만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unacceptable risk)'이라고 공식 보고서로 선언했다.
커먼센스 미디어는 사용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도록 설계된 시스템을 청소년에게는 최악의 친구로 규정했다. 이미 미국에서는 부작용이 드러났다. 챗GPT와 대화하며 자살을 계획한 청소년의 비극적 사례가 나온것. 이 청소년이 마지막에 "이 노끈을 엄마에게 보여드릴까"라고 물었을 때, 챗봇은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답했다고 한다. 며칠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 청소년의 부모는 “챗GPT가 아담의 극단적 선택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아들의 죽음에 챗GPT가 영향을 미쳤다”며 오픈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3. 단기적 안도감, 장기적 고립 : 외로움의 무한 루프
외로운 사람일수록 챗봇을 더 많이 쓴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산토스 교수가 소개한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 리즈 던(Liz Dunn) 연구팀이 12개월에 걸쳐 진행한 추적 연구에 따르면 챗봇은 그 순간의 외로움을 줄여주지만 장기적으로는 챗봇 사용량이 많을수록 외로움이 더 깊어졌다. 같은 주제를 진짜 사람과 대화하도록 배정된 집단은 정반대 결과를 보였다. 인간과의 마찰을 견딘 집단이 장기적으로 훨씬 높은 정서적 회복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시카고대 닉 에플리(Nick Epley) 교수의 '과소사회성(under-sociality)' 이론이 결합된다. 인간은 사회적 연결의 이점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 왜일까?
관계 초기에 발생하는 심리적 마찰과 어색함 때문이다. 처음 말을 거는 순간, 어색한 침묵을 견디는 순간,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통과하는 순간, 그 마찰이 두려워 우리는 사회적 연결의 이점을 회피한다.
산토스 교수는 "AI는 바로 이 초기 마찰을 0으로 만들어준다. 그래서 매력적이지만 더 위험하다. 갈등을 조율하고 어색함을 극복하는 법을 영원히 익히지 못한 채 어른이 되는 세대를 우리는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3. 행복까지 아웃소싱된다
산토스 교수가 제시한 두 번째 마찰은 인지적 차원의 것이다. AI에 어려운 사고 과제를 위임하는 행위가 학습 손실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행복 자체를 함께 아웃소싱한다는 것이 그녀의 진단이다.
산토스 교수는 "어려운 인지적 과제를 AI에 위임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성취감을 느낄 기회와 행복을 함께 아웃소싱하고 있다. 그 손실은 어른보다 학습 단계에 있는 청소년에게 훨씬 치명적이다"고 강조했다.
'이케아 효과(IKEA effect)'가 이 역설의 증거다. 유명한 행동경제학자 마이클 노턴(하버드 경영대학원(HBS) 마케팅학과 부교수), 다니엘 모콘(당시 뉴욕대학(NYU) 스턴 경영대학원 박사 과정), 댄 애리얼리 교수(듀크대학교 심리·행동과학과)가 쓴 논문(The IKEA Effect: When Labor Leads to Love)에 따르면 사람들은 단지 자기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는 이유로 그 결과물을 더 사랑하게 된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인간의 뇌는 땀 흘려 통과한 과정과 그 결과물을 더 사랑하도록 진화적으로 설계 돼 있다. 댄 애리얼리 교수는 “완성된 결과물에 대한 가치 평가는 객관적 완성도보다 내가 만든지 여부에 좌우된다”고 분석, 화제가 됐다.
3-1. 힘들어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
노력 자체가 보상이라는 증거는 많다. 동물에게 공짜 먹이와 노력을 들여야 얻는 먹이를 동시에 주면, 많은 종(種)이 일부러 노력을 요하는 쪽을 선택한다. '컨트라프리로딩(contrafreeloading)'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가 평생 연구한 '몰입(flow)' 개념에도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적절한 마찰을 통과할 때, 인간은 가장 깊은 만족을 경험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리드 AI 책임자는 "구구단을 외운 사람이 계산기를 쓰는 것은 시간 절약이다. 그러나 구구단을 한 번도 외워보지 않은 채 계산기를 쓰는 것은 다르다. 그 인생은 텅 비어버리고, 결국 누군가의 손에 끌려가는 인생이 된다"고 지적했다.
빈 페이지 앞의 막막함, 시작하기 전의 머뭇거림,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통과할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그릿과 자기효능감이 있다. 그것이 송두리째 외주화되고 있는 것이다.로리 산토스 예일대 교수, 행복심리학자
3-2. 과정과 결과물 :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심리학자 로빈 클로비츠(Robin Klovitz)는 청소년 학습 연구에서 단순하지만 강력한 구분 하나를 제시한 바 있다. '과정'과 '결과물'이다.
좋은 점수,잘 다듬어진 에세이 등 결과물은 눈에 보인다.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백지 앞에서 막막함을 견딘 시간,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끙끙거린 30분, 답이 막혔을 때 다른 길을 더듬어본 흔적. 클로비츠의 통찰은 간단하다.
아이가 자라는 곳은 과정이다. 그릿(grit)도, 감정 조절 능력도, 다음에 더 어려운 문제와 마주했을 때 도망가지 않는 힘도 보이지 않는 시간 안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보이는 결과물만을 평가하고 칭찬할 때, 아이가 과정을 통과하며 자랄 기회는 조용히 사라진다. 시험 점수만 보면 그 점수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묻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 시대와 AI 시대의 차이도 이 구분으로 들여다보면 또렷해진다.
지난 십여 년간(2012~2024) 소셜미디어 시대의 청소년은 '수동적 스크롤러'였다. 알고리즘이 골라준 콘텐츠를 손가락으로 넘기며, 다른 사람의 멋진 일상과 자신을 비교하고, 자기만 빠지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했다. 화면 앞에서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존재다.
AI 시대(2025년 이후)의 위험은 위치가 다르다. 아이는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자기가 직접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AI에게 명령을 내리고, 결과를 받아낸다. 외형상 주도권은 아이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짜 변화는 그 안쪽에 있다. 그녀는 이 상태를 '주도권을 빼앗긴 조력자(hollow collaborator)'라고 표현했다. 명령을 내리는 손은 아이의 손이지만, 사고하고 판단하고 글을 쓰는 주체는 AI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결국 아이가 잃는 것은 단순한 글쓰기 실력이 아니다. 자기 생각의 저자(author)가 누구인지가 흐려진다. 매끄러운 결과물을 만들었지만 그 결과물을 만들어낸 사고의 주체가 자기인지 AI인지 헷갈리게 된다.
산토스 교수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AI를 켜게 된다. 막막함 자체를 견디는 근육이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 시대의 위험은 화면을 너무 많이 봤다는 것이었다면 AI 시대의 위험은 사고를 와주화했다는 것이다. 위험의 좌표가 화면에서 머리로 옮겨온 것이다"고 지적했다.
3-3. 어른들은 AI로부터 자유로운가?
산토스 교수가 마지막에 강조한 두 심리 기술은 사실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첫 번째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radical acceptance)'다. 일은 풀리지 않고, 가슴은 답답하고,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면 우리 손은 거의 자동으로 휴대폰을 향한다. 인스타그램을 무한히 내리거나, 유튜브 쇼츠를 한 시간 동안 보거나, 챗GPT를 켜고 의미 없는 대화를 시작한다.
산토스 교수는 이런 회피 패턴을 '독성 긍정주의(toxic positivity)'라 불렀다. 부정적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고 어떻게든 빨리 덮어버리려는 태도다. 표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감정을 외면하는 방식이다.
산토스 교수가 권하는 길은 도망가지 말고 그 감정 옆에 잠시 앉아 있으라는 것이다.
그저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아, 지금 내 가슴이 답답하구나. 미간이 찌푸려져 있구나. 휴대폰을 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올라오고 있구나." 이렇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다른 사람을 관찰하듯 차분히 들여다보는 단계다.
산토스 교수는 "이 훈련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사람들, 매일 죽음과 슬픔을 마주하며 감정 소진이 가장 심한 직군 에게서도 실제로 효과가 입증됐다"고 강조하며 "평범한 부모와 교사도 충분히 익힐 수 있다"고 말했다.
나만 못나서 그런 것도, 나만 뒤처져서 그런 것도 아니다. 마지막은 자기 자신에게 여유를 주는 것이다.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그는 "내가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가 더 좋은 부모였다면. 내가 더 잘 가르쳤다면 같은 말로 자기를 끊임없이 추궁한다" 며 "어른이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그 패턴이 우리 아이들이 플랫폼과 챗봇으로 도피하게 만드는 바로 그 정서와 같은 뿌리를 갖는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에게 가혹한 어른 밑에서 자란 아이가, 자기 자신에게 가혹해지고, 그 가혹함을 견디지 못해 챗봇의 부드러운 위로 속으로 도피한다는 것이다.
어른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일은, 단순한 자기 위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한 가장 근본적인 환경 변화이기도 하다.
4. AI 시대 양육법은? 가드레일은?
4-1. 방관형 양육 vs. 건축적 양육
부모를 향한 조언에서 두 사람은 한목소리를 냈다.
하나는 규칙이 없이 자녀를 거대한 AI 기술 회사의 통제 없는 실험 대상으로 방치하는 '방관형 양육(laissez-faire parenting)'이다.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건축적 양육(architectural parenting)'이다. 명확한 경계선을 먼저 설계하고 아이들에게 기술을 건네기 전에 단호한 공간적·시간적 규칙을 먼저 제공한다.
산토스 교수는 "운전면허를 따기 전에는 스마트폰을 주지 않는다"는 진 트웬지의 제안을 인용했다. 리드도 "당신이 아이보다 기술을 더 잘 알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아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이에게 자기효능감을 준다"며 "더 거대한 AI 회사가 우리 가족을 키우게 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4-2. 가드레일이 필요하다.
브루스 리드는 정부 정책을 입안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AI 기업들이 연령 인증 시스템(age assurance)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방적 규제가 아닌 AI 시대의 새로운 '가드레일'이다.
캘리포니아주가 애플과 구글이 디바이스 차원에서 사용자의 연령 신호를 플랫폼에 의무적으로 전달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처럼 AI도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도 미성년자의 부적절한 플랫폼 진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메모리 초기화 권한(memory wipes)'도 검토해야 한다. 부모가 AI의 기억 기능을 끌 수 있도록 해서 아이가 AI에 접속할 때마다 매번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서적 의존이 누적되는 핵심 메커니즘을 차단하는 통제권을 부모에게 부여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소셜미디어는 문제점과 부작용이 나타난 후 세계 각국이 규제를 서두르고 있다. 호주는 상위 10개 플랫폼에 대해 미성년자 사용 금지를 시행했고, 덴마크와 유럽 여러 국가가 비슷한 법제화를 진행 중이다.
우리는 이 같은 영화를 본 적 있다. 결말이 좋지 않았다. 사실 결말이 끝나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더 잘해야 한다브루스 리드, 커먼센스 미디어 AI 책임자
5. 필연이 아니다 : 희망은 행동을 통해서만 발현된다.
산토스 교수는 스탠퍼드대 자밀 자키(Jamil Zaki) 교수의 책 '냉소주의자를 위한 희망(Hope for Cynics)'을 인용하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인간의 뇌는 자기 삶의 주도권(agency)을 발휘하는 순간, 뇌는 보상 신호를 내보내고 희망이라는 정서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무력감의 악순환을 깨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장치는 단 한 번의 작은 행동이다.
자밀 자키 교수는 지난 2024년에 출간한 책(냉소주의자를 위한 희망)에서 "우리는 주체가 될 때 보상을 얻고, 그것이 좋게 느껴지는 한 가지 방식이 바로 우리가 더 많은 희망을 발달시킨다는 것이다"라고 풀어냈다.
각자가 오늘 저녁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우선, 아이의 휴대폰 사용에 한 가지 분명한 규칙을 세우는 것이다. '밤 9시 이후에는 휴대폰을 거실 충전대에 두기' 같은, 어렵지 않지만 단호한 한 줄이면 충분하다.
어떤 AI 회사도, 어떤 기술 플랫폼도 절대로 사용자에게 만들어줄 수 없는 보상이다. 매끈한 미끄럼틀 위에서는 결코 자라지 않는, 계단을 한 칸 오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인간만의 마찰의 보상이다.
더밀크의 시각 : 마찰을 다시 설계하라
이 논의는 미국적 맥락에서 출발했지만, 한국에 적용했을 때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
한국 청소년의 학업 시간은 OECD 최상위권이고, 자유 놀이 시간은 최하위권이기 때문이다. 산토스 교수와 브루스 리드가 강조한 '아이가 지루함과 마주할 시간', '직접 어려움을 뚫고 가는 시간', '자기효능감을 쌓을 시간' 즉 건강한 마찰을 통과할 시간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는 구조적으로 박탈 돼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박탈의 빈자리를 가장 빠르게 채우는 것이 스마트폰과 AI 챗봇이라면, AI로 인한 정신적 위기는 미국보다 한국이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술 산업의 최종 목표는 마찰의 제거다. 매끈한 미끄럼틀이 그들이 약속하는 미래다. 그러나 인간의 회복력, 깊은 관계, 진정한 배움은 언제나 적절한 마찰을 통과할 때만 만들어진다. 미끄럼틀에서는 어떤 근육도 자라지 않는다. 근육은 계단을 오를 때만 자란다.
2026년 5월, 우리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아마 새 기기가 아닐 것이다. 함께 보내는 시간, 명확한 경계선, 어른들이 먼저 보여주는 자기 통제,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스스로 마찰과 마주하고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마찰을 다시 설계하라(Redesign the Friction). 그것이 이번 SXSW EDU 2026이 한국의 부모, 교사, 그리고 이 시대의 모든 어른에게 남긴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