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구조가 바뀐다… AI 시대, HR은 왜 전략의 중심이 되는가?
[AI 시대, HR의 역할] 더밀크 세미나
AI는 일자리를 없애기보다 일의 구조와 역할 정의를 재편
HR은 채용·평가를 넘어 비즈니스 전략 설계하는 핵심 파트너(HRBP)로 부상
한국 HR은 통제·행정 중심에 머물어... 의사결정 이후에 호출되는 한계 직면
성공하는 HRBP... 비즈니스 이해, 실행력, 리더를 움직이는 신뢰 기반 영향력
AI 시대, 인재 전략은 더 이상 HR만의 과제가 아니다. 글로벌 스킬셋, 미래 노동시장, 인간과 AI의 협업 구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AI가 산업에 미치는 임팩트는 단순한 기술 트렌드가 아니다. 노동의 구조 자체가 재편되고 있다는 신호다. 현재 기술 수준만으로도 미국 전체 근로 시간의 절반 이상이 이론적으로 자동화 가능한 단계에 도달했다. 일자리 소멸이 아니라 일이 수행되는 방식과 역할 정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HR의 역할이 커졌다. HR은 더 이상 채용, 평가, 교육, 조직문화를 관리하는 지원 조직에 머무르지 않는다. 비즈니스의 최전선에서 전략을 설계하고 의사결정을 함께 책임지는 '전략 파트너(HRBP)'로 진화하고 있다. 인간과 지능형 기계가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를 설계하는 조직으로 역할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더밀크는 AI 시대 인재 전략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세미나를 국내 최대 HR 커뮤니티 '기고만장'과 인재 및 세미나 전략 기업 '캐스팅코드'의 후원으로 지난 1월 30일 성수동 상상플러스에서 개최했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한연선 더밀크 리서치센터장이 '글로벌 트렌드로 본 미래 노동 구조 변화'를 분석했고, 두 번째 세션에서는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에서 8년째 HRBP로 근무 중인 K님이 실리콘밸리 현장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참가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국내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한 배경의 HR 실무자 26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어진 대화는 한국 HR이 직면한 현실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이 됐다(기사 내 회사와 이름은 모두 익명으로 처리했다).
한국 HR의 가장 큰 고민 "왜 우리는 결정 이후에 호출되나?"
"HRBP 조직이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역할 정립이 안 됐어요."
"캘리브레이션 할 때 한 사람에 대해 3시간을 논의해요. 기준이 없으니까요."
"리더들이 결정을 우리한테 떠넘겨요. 그러면서 결과가 나쁘면 HR 탓을 해요."
이날 발표한 K님은 회사 하드웨어 헤드 직속 4명의 부사장(VP)을 서포트하는 HR비즈니스파트너(BP)다. 직속 부사장 4명의 일을 합치면 A사의 거의 모든 하드웨어 제품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한국 대기업 S사에서 인수한 미국 반도체 회사 인사팀에서 근무하며 한국 회사 문화를 경험한 바 있다.
세션에 참가한 HR 전문가의 배경은 다양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부터 중견기업, 스타트업 까지. 그러나 그들이 품고 온 질문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한국 대기업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는 K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국 대기업이 미국에서 인수한 B사에서 일하며 경험한 한국 기업 문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K님은 "제가 한국 회사에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보고서예요. 무슨 보고서를 이렇게 많이 써야 되는지... 미국에서는 CEO한테도 그냥 이메일 보내면 됩니다."
그는 지난 2005년 경영 잡지 '패스트컴퍼니'에 실린 "왜 우리는 HR을 싫어하는가(Why We Hate HR)"이라는 기사를 언급했다.
"HR은 똑똑한 애들이 없다, 프로세스에만 집중하고 비즈니스 영향력은 생각 안 한다. 굉장히 잔인한 자기 평가가 이루어졌어요. 이게 미국 얘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봤을 때 한국 HR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도 똑같아요"
그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HR 비즈니스 파트너는 때수건 같은 거예요. 안 써보면 몰라요. 효과를 알아야 쓰는 거지, 강요한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에요.란 점이었다.
핵심은 C레벨 회의(C-Table)에 HR을 끼워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가치를 보여줘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CEO 스태프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미팅을 하는데, 왜 HR은 거기에 자리가 없는가? 무조건 '나를 리포트에 넣어달라, CC를 해달라'고 해서가 아니라, 나의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먼저 오게 만드는 게 HRBP의 역량입니다."
성공하는 HRBP의 3가지 조건
HRBP로서 가장 중요한 게 비즈니스를 알 수 있어야 해요. 누가 어떤 일을 하고, 어디에 포텐셜이 있고, 어떤 역량이 있는지를 다 알아야 조직 개편도 리더와 함께 할 수 있어요. 비즈니스 모르면 HRBP 아닙니다A사의 HRBP K님
K님은 현재 자신이 코칭하고 있는 주니어 HRBP의 사례를 들며 이 역할에서 성공하기 위한 핵심 역량을 정리했다.
HRBP의 핵심 역량은 회사 비즈니스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수다. A사에서 그녀가 리더와 함께 조직 재설계를 논의할 수 있는 이유는 각 팀원이 무슨 프로젝트를 맡고 있고, 누가 승계 후보인지, 어떤 팀이 인력 보강이 필요한지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전략과 실행을 동시에 수행하는 능력도 갖춰야 한다. K님은 "전략만 말하는 HRBP는 공허하다"고 지적했다.
"'우리 조직 매니저가 약하다'는 분석까지만 하면 안 돼요. 그걸 달성하기 위한 매우 세부적인 태스크를 쪼개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큰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전략은 방향을 제시하지만, 실행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신뢰가 쌓인다.
그리고 K님이 가장 강조한 것은 리더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이 역량이야말로 AI가 HRBP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카리스마든, 신뢰든, 데이터든, 경험이든, 관계든 뭐든 상관없어요. 비즈니스 리더를 인플루언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핵심은 리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HRBP에게 먼저 의견을 구하느냐의 여부다. 그렇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영향력의 원천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국 HR팀은 사내 경찰인가? 감사인가? ... 파워를 현업에 돌려줘야
"한국에서 HR이 가진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사내 경찰 역할, 감사 역할을 너무 많이 하고, 너무 많은 파워를 갖고 있다는 거예요."
K님이 한국 HR들에게 가장 강하게 권고한 건 권한의 위임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한 대기업 주재원의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본인이 누구를 임원으로 만들진 못해도 그 사람을 자를 수는 있다.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그게 HR을 하시는 분의 마인드셋이라면, 사내 HR 팀에 대한 신뢰는 절대 생길 수 없어요."
한국식 평가 시스템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매니저가 A를 주고 싶었는데 HR이 분포 때문에 못 주게 했다. 그래서 B를 주면서 '나는 너한테 A를 주고 싶었는데 HR이 못하게 해서 못했다'고 말해요. 그럼 이 직원이 HR에 대해 어떤 신뢰를 갖겠어요?"
미국은 다르다. "평가가 좋지 않아도 그 사람의 노력을 인정해야 하면 보너스를 더 줄 수 있어요. 평가와 보상은 공식이 아니에요. 방향성만 맞으면 됩니다. HR이 막는 순간, HR은 적이 됩니다."
국내 대기업 L사에서 온 참가자가 물었다. "리더들이 뭔가 결정을 하려 할 때, HRBP가 반대 의견을 내면 관계가 나빠지지 않나요?"
K님의 대답은 명쾌했다. "저는 '푸시백'을 상당히 많이 해요. 리더들이 뭘 하고 싶다고 했을 때 '확실합니까(Are you sure)?'라고 물어봐요. 이런 장점이 있고 이런 단점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이런 문제가 있을 텐데... 리더가 못 보는 부분을 보여주는 역할이에요."
리더들이 그런 푸시백을 싫어하지 않느냐고? "상당히 좋아해요. 그렇게 푸시백을 안 하면 '내가 너한테 올 이유가 없다'고 말해요. 새로운 관점을 주기 때문에 나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피드백을 실제로 많이 듣습니다."
한국은 왜 저성과자 관리가 어려운가?
음식물 처리 스타트업 대표 C씨가 질문했다. "피드백을 6개월간 줬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리더가 있어요. 미국처럼 해고가 자유롭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K님은 솔직했다. "미국 같으면 아웃해서 새로운 리더를 뽑았을 거예요. 한국은 그게 안 되니까 어려운 거죠."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짚었다. "그분이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해결책은 그분이 제일 잘 알아요. 전문가니까. 근데 본인이 인정을 안 하면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을 거예요."
한국 자동차 회사의 상담 요청 사례도 공유했다.
"지금까지 하드웨어 회사였는데 소프트웨어로 변신해야 하니까, 하드웨어 인력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변신시키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얘기를 듣고 '골프 캐디한테 골프 선수가 되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이었으면 20% 자르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새로 뽑았겠죠. 한국은 해고가 자유롭지 않으니까 이런 고민이 생기는 거예요."
K님은 미국과 한국의 노동 시장 구조 차이를 설명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노동 계약이 '임의 고용(At-will Employment)' 형태 입니다. 언제든 나도 회사를 나갈 수 있고, 회사도 나를 내보낼 수 있어요. 그래서 최고 인재를 유치하고 유지하는(리텐션) 것이 인사팀의 핵심 과제예요. 어디는 점심이 공짜라더라, 헤어숍이 있다더라 이게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직원을 잡아두려고 하는 거예요."
급여 체계도 완전히 다르다. "미국은 잡(Job)별로 마켓 페이가 다 정해져 있어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시니어 레벨은 얼마, 시스템 레벨은 얼마. 한국은 급여가 잡이나 롤과 연계된 게 아니라 호봉이에요. 엔지니어가 HR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잖아요. 미국에서는 불가능해요. 엔지니어 초봉이 13만 불인데 HR은 6만 불이에요. 13만 불 받던 사람이 6만 불로 오지 않잖아요."
이런 구조적 차이가 HR의 역할을 규정한다. "한국 HR이 직무 설계에 50명을 투입한다고 들었어요. 미국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하이어링 매니저가 직접 잡을 정의하고, 포스팅하고, 인터뷰하고, 채용 결정을 하니까요."
K님이 한국 HR들에게 가장 강조한 실행 포인트는 매니저 교육이었다.
"파워를 현업에 주려면 매니저들이 뭘 알아야 해요. 성과 평가를 어떻게 하는지, 캘리브레이션은 어떻게 하는지, 보상을 어떻게 얼라인하는지. 이걸 모르는데 파워를 줄 수 없잖아요."
피드백 문화의 부재도 문제로 지적했다. "한국 매니저들이 피드백을 못 줘요. 사실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행위이긴 해요. 근데 미국은 1년에 한 번 퍼포먼스 리뷰가 셋업이 돼 있어요. 한국은 그게 안 되다 보니까 직원들이 피드백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요."
그의 조언은 구체적이었다.
"피드백을 줄 때는 기대치(Expectation)를 먼저 명확히 하세요. '너의 레벨은 시니어 디렉터야. 시니어 디렉터는 이것도 봐야 해. 근데 이걸 안 하니까 이것도 해라' 두리뭉실하게 '잘한다'가 아니라 굉장히 구체적으로 줘야 합니다"
세션 내내 케이님이 반복한 단어는 '신뢰(Trust)'였다.
"미국 조직 문화를 가장 잘 정의하는 근간은 신뢰입니다. 니가 어디서 일하든, 화장실에서 일하든, 자리에 없든 상관 안 해. 그 잡만 잘하면 돼. 한국은 회사가 신뢰 기반이라고 하는데 일하는 방식을 보면 신뢰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불필요해보이는 서류에 의지하고 활동을 제약하는 사내 규칙에 의지합니다. 신뢰가 있으면 서류나 규칙은 필요없죠"
HRBP는 권한의 자리가 아니라 신뢰의 자리
K님이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이 없어도 비즈니스는 돌아간다. 그런데, 당신이 있으면 더 잘 돌아가는가?"
그는 HRBP를 '권한의 자리'가 아니라 '신뢰의 자리'로 재정의했다. 통제자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공동 설계자. 결정권자가 아니라 영향력 있는 조언자. 사내 경찰이 아니라 가이드 해주는 '코치'.
"HR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리더들이 고민을 가지고 왔을 때 대답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에요. 그리고 미래를 예견하는 것. 현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종합해서 '앞으로 이런 챌린지가 발생할 것 같으니까 이런 계획을 세우자'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세션이 끝난 후에도 참가자들은 K님을 둘러싸고 질문을 이어갔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미국 방문 시 만남을 약속했다. 한국의 HR들은 답을 찾고 있었다. K님이 보여준 건 정답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사내에 두터운 신뢰를 쌓아 자연스럽게 최고 경영진이 회사의 방향을 좌우하는 의사결정의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HRBP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