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된 매출 80조 제약사 사노피, AI로 일하는 방식을 재설계하다
[단독] 엠마누엘 프렌하드 사노피 CDO 인터뷰
연 매출 80조원 사노피, AI로 구매·IT 지원·영업 뒤집다
“대담한 목표 세워라”… ‘플레이’ 10억 개 데이터 포인트 추적
“AI, 신약 발견 과정서 인간 증강”... 임상 예측 가능
더밀크의 시각: AX, 인식의 패러다임을 바꿔라
AI는 단순한 업무 자동화에 쓰여서는 안 된다.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재발명하는 데 쓰여야 한다.엠마누엘 프렌하드(Emmanuel Frenehard) 사노피 최고디지털책임자(CDO)
6월 1일(현지시각) 샌프란시스코 모스콘센터. ‘스노우플레이크 서밋 26(Snowflake Summit 26)’ 키노트 무대에 오른 한 발표자가 흥미로운 시연을 진행했다.
“의사를 만나 영업하는 영업 담당자라고 가정해 보죠. 사노피의 내부 AI 에이전트인 ‘컨시어지(Concierge)’에 전화를 걸겠습니다. ‘컨시어지, 지금 의사 해나씨를 만나러 갈 건데, 미팅 계획을 짜줘.’”
무대에서 라이브로 진행된 시연에서 사노피의 AI 에이전트 컨시어지는 의사의 처방 이력과 관심 진료 분야, 어떤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면 좋을지에 대한 팁까지 즉각 제시했다. 과거 수 시간의 조사와 사실 확인이 필요했던 작업이 두세 번의 질문으로 몇 초 만에 완료된 것이다.
연 매출 80조원(2025년 기준, 436억2600만 유로)의 글로벌 제약사 사노피가 스노우플레이크와 함께 구축한 AI 에이전트 ‘컨시어지 포 더 필드(Concierge for Field)’ 시연이었다. 세계 곳곳의 사노피 영업 담당자들은 이 에이전트로 의사·의료기관을 방문하기 직전 필요한 정보를 즉시 확인해 활용한다.
사노피는 1973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다국적 바이오파마 기업이다. 핵심 치료 영역은 면역학·신경학·종양학·희귀질환·백신 분야로 아토피 피부염 치료제 듀피젠트(Dupixent·성분명 dupilumab) 등을 주력 제품으로 보유하고 있다.
제약사 사노피가 AI 업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스피드' 때문이다. 전통 산업의 틀을 깨고 AI를 대규모로 활용하는 첫 바이오파마 기업이 된 것. 이를 위해 IT·데이터·AI·사이버보안·인프라·디지털 기능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했다.
‘AI 퍼스트 바이오파마’ 전략을 이끄는 사령탑이 바로 프렌하드 CDO다. 월트디즈니, 아이플릭스 등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디지털 전환을 이끈 뒤 사노피에 합류한 그는, 측정과 실험의 문화를 조직에 이식하며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레거시 기업의 AI 전환, AI 에이전트 활용이 최대 화두로 떠오른 지금, 사노피는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 샌프란시스코 컨퍼런스 현장에서 프렌하드 CDO를 단독으로 만나 AX 경험과 노하우, 전략에 관해 물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대담한 목표를 세워라”… ‘플레이’ 10억 개 데이터 포인트 추적
Q: ‘대규모로 AI를 활용하는 최초의 바이오파마’라는 포부를 밝혔다. 현재 그 여정은 어느 정도까지 와 있나?
A: 사노피는 제약회사다. 새로운 약을 발견하고 시장에 내놓는 과정은 매우 길고 복잡하다. 평균적으로 신약 하나가 시장에 나오기까지 약 10~12년이 걸린다.
‘AI에 올인하겠다’, ‘AI를 대규모로 도입하는 선도적인 바이오파마 기업이 되겠다’는 선언은 신약 개발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AI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적용하겠다는 의미다. 신약 발견 단계, 임상시험, 제조, 상업화 영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속도를 높이고, 환자에 대한 접근성을 개선할 수 있는 모든 곳에 AI를 사용하고 있다. 대담한 목표를 세우면 회사 전체가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Q: 내부 AI 플랫폼 ‘플레이(Plai)’를 3만 명 이상 직원이 사용하며 의사결정 속도가 두 배로 빨라졌다고 들었다. 직원들이 내부 AI를 사용하게 만드는 데 있어 가장 도전은 무엇이었나?
A: 플레이는 에일리 랩스(Aily Labs)라는 파트너 기업과 함께 만든 플랫폼이다. 누구나 쉽게 AI에 접근, 인사이트, 추천, AI 기반 예측을 제공하기 위해 설계했다.
의사결정일 수도 있고 원재료 구매, 특정 제품을 특정 지역에 배분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임상시험에도 적용된다. 현재 플레이는 약 10억 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추적한다.
핵심은 데이터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업은 AI 도입 과정에서 여러 단계를 거친다. 우선 데이터 통합이다. 우리는 데이터 규모가 크기 때문에 스노우플레이크 같은 외부 솔루션을 활용, ‘데이터 레이크(Data Lake, 대규모 원시 데이터를 가공하지 않고 원래 형식 그대로 저장하는 중앙 집중식 저장소)’에 데이터를 통합했다.
그다음 질문은 ‘데이터를 어떻게 쓸 것인가?’다. 데이터는 여전히 해석도, 쓰기도 어렵다. 우리는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추천 받고, 그 추천에 투표할 수 있으며 효과를 확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제품이 판매가 잘 되는데, 제조 원재료 구매량은 낮다고 해보자. 이럴 때 플레이가 ‘판매가 잘 되는데 원재료가 부족하면 재고가 바닥난다’고 알려준다. 이미 알고 있던 정보일 수도 있고, 예측하지 못한 상황일 수도 있다. 모든 직원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형태로 만들었다.
“AI, 신약 발견 과정에서 인간을 증강”... 임상 예측 가능
Q: 신약 개발에 AI를 사용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줄 수 있나?
A: AI는 신약 발견 과정에서 효과적이다. 지금 역사상 어느 때보다 많은 과학 논문이 발표된다. 인간이 모든 논문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AI를 활용, 논문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다. 예를 들어 인체의 특정 유전자가 결핍을 일으킨다는 가설이 있을 때 AI가 관련 연구 결과를 살펴보고, 검증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다음은 AI가 이 문제를 표적으로 삼을 분자를 설계한다. 우리가 만드는 분자는 몸 전체가 아니라 기능 이상이 있는 특정 부분만 겨냥한다. 이 때 AI 모델링을 활용, 분자가 특정 문제 부위에 결합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시뮬레이션한다.
다음 단계는 생명과학 AI 플랫폼 ‘벤치사이(BenchSci)’라는 회사와 협력한다. ‘AI 실험실 조수’다. 사노피는 53년 됐다. 많은 실험 데이터가 디지털화 돼 있다. AI를 사용해 디지털 트윈으로 만든 가상의 간에서 작용하는 약물의 독성을 시뮬레이션한다.
임상시험 AI 시뮬레이션 업체 ‘퀀트헬스(QuantHealth)’와도 협력, 실제 임상시험이 시작되기 전 데이터를 활용, 결과를 예측한다.
이 모든 단계에 AI가 있다. 하지만 과정을 이끄는 것은 인간이다. 모든 단계에서 인간이 결과 및 예측을 검토한다.
Q: AI가 인간을 증강하는 환경에서 우리는 어떤 일에 더 집중해야 할까?
A: 나는 AI는 단순한 업무 자동화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있다. AI는 비즈니스 프로세스의 재발명에 사용돼야 한다. 단순 자동화와 비즈니스 프로세스의 재발명은 매우 다른 이야기다.
인간은 무언가를 개선하는 데 능숙하다. 당신에게 자동차를 주고 ‘이 차를 더 빠르게 만들어보라’고 요청하면 기존 방식대로 타이어를 바꾸고, 부품을 새 것으로 바꾸고, 최신 터보 엔진을 달 수 있다.
하지만 ‘경주에서 이길 수 있는 새로운 이동 수단을 설계해 달라’고 말하면 어려워진다. AI는 바로 이런 영역에 사용돼야 한다. 우리가 이전에 하던 일을 더 잘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을 하도록 만드는 데 AI를 써야 한다.
사노피가 스노우플레이크, AI 워크플로(workflow) 기업 ‘엘리멘텀(Elementum)’과 손잡고 업무 절차를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설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사노피 내부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방식을 보면 기존 시스템에 들어가서 처리하는 방식이 아니다. AI 에이전트 컨시어지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바꿨다.
마치 5성급 호텔의 컨시어지처럼 컨시어지에 필요한 것을 자연어로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실험을 위해 다음과 같은 화학 제품이 필요하다. 과거에도 구매한 적이 있다’고 말하면 AI가 과거 구매 이력을 불러오고 주문을 넣는 식이다.
구매·IT·직원 지원 방식 바꾼 ‘컨시어지’... “수억 유로 매출 성장 기대”
Q: 언급한 업무 절차 변화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A: 어떤 회사든 직원들의 활동은 구매, 휴가 신청, IT 지원 등 시스템에 의존한다. 대기업에는 실제로 수천 개의 시스템이 있다. 그만큼 데이터도 흩어져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약 1년 전 "애플리케이션이 아니라 데이터 레이크 위에서 바로 AI를 실행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했다. 이후 데이터 레이크위에서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설계할 수 있었다. 모든 청구서와 구매주문서를 스캔하는 AI를 만들었다. 공급-구매-판매가 단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이뤄진다.
사노피는 연간 약 180억유로(약 31조원)를 구매에 지출한다. 에이전트 방식으로 수천만 유로를 절감할 수 있다.
IT 지원도 마찬가지다. 7만5000명의 사노피의 모든 직원이 IT 담당 직원에게 전화하지 않고도 컨시어지 안에서 지원 활동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IT 지원의 80%를 AI 에이전트로 처리하도록 설계했다.이 영역에서만 1000만 유로 이상의 지원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현장 영업 담당자를 위한 ‘컨시어지 포 더 필드’의 경우 수억 유로 규모의 매출 성장을 이끌 것으로 기대한다.
Q: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얻은 경험을 사노피에 적용한 사례가 있다면? 헬스케어 산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다.
A: 미디어·엔터테인먼트에서 가져온 것은 측정의 문화다.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측정한다. 클릭, 조회, 전환, 참여도, 박스오피스까지. 성과를 측정하는 것에 집착한다.
제가 사노피에 와서 발견한 것은 제약 산업은 그렇게 많이 측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환자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았지만, 성공을 측정하기가 더 어려웠다. 환자가 의사에게 가면 의사는 처방전을 주고, 환자는 다시 약국에 가서 처방약을 받는다. 제약회사는 그 과정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지 못한다.
제가 사노피에 가져온 것은 소비자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사노피는 환자를 위한 아토피 치료 앱을 일본, 독일, 미국에서 출시했다. 약 복용 뿐 아니라 어떤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지, 환자가 먹은 음식이 어떤 증상을 유발하는지까지 본다.
반대로 사노피에서 느낀 것은 생명의 중요성이다.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바이오파마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걸 볼 때, 그 영향은 한 사람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제가 이 산업을 좋아하는 이유다. 지금까지 일해본 어떤 산업보다 목적의식이 크다.
더밀크의 시각: AI로 ‘개선’할 것인가 ‘재발명’할 것인가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곱씹어볼 대목은 프렌하드의 철학이다. “AI는 단순한 업무 자동화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AI는 비즈니스 프로세스의 재발명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는 단순 자동화와 재발명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못 박았다.
이 구분은 지금 AI를 도입하는 거의 모든 기업이 서 있는 갈림길을 정확히 짚는다. 대부분의 조직은 AI로 기존에 하던 일을 더 빠르고 저렴하게 만드는 데 집중한다. 보고서 작성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고, 고객 응대를 자동화하고, 문서 검토 속도를 높인다.
분명 가치 있는 일이지만, 프렌하드의 비유를 빌리면 기존 자동차에 터보 엔진을 다는 작업이다. 더 빨라지긴 해도 여전히 같은 차다.
진짜 질문은 그다음에 있다. 타이어를 바꿔 더 빠른 차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경주에서 이길 새로운 이동 수단을 설계할 것인가.
AI가 본격적으로 쓸 만해진 지금이야말로 기업이 후자를 시도해 볼 시기다. 업무를 자동화하기 전에 그 업무가 애초에 왜 존재하는지, 같은 목적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달성할 수는 없는지 되묻는 것이다.
사노피의 사례가 이 차이를 보여준다. 직원이 수천 개의 내부 시스템 중 하나에 로그인해 처리하던 일을, AI 에이전트 컨시어지에 자연어로 말하면 끝나는 방식으로 바꿨다. 표면적으로는 인터페이스가 편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서 일어난 일은 다르다.
사노피는 “애플리케이션이 아니라 데이터 레이크 위에서 바로 AI를 실행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기존 시스템 위에 AI를 얹는 대신 데이터를 한곳에 모으고 그 위에서 업무 절차 자체를 다시 그렸다.
시스템이 정한 순서를 사람이 따라가던 구조에서, 사람이 말하면 AI가 흩어진 데이터를 꿰어 처리하는 구조로 바뀐 것이다. 이것이 개선과 재발명의 차이다.
사노피의 시도가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컨시어지 포 더 필드가 수억 유로의 매출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은 기대치이고, 구매에서 수천만 유로를 절감하는 부분도 이제 막 시작된 변화다. 프렌하드 본인도 “사노피가 AI를 가장 잘 쓰는 바이오파마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고 했다. 결정된 성과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실험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실험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 그 주체가 사노피라는 데 있다. 신약 하나가 시장에 나오기까지 10~12년이 걸리고, 환자의 생명이 걸린 만큼 안전과 검증, 규제 준수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산업군이 제약이다. 1973년에 세워진 53년 된 기업이 가장 보수적일 법한 영역에서, 그것도 외부 컨퍼런스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프로세스 재설계를 선언하고 시연했다.
실패의 비용이 큰 산업의 대기업이 공개적으로 베팅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이 흐름이 일부 테크 기업의 실험에 그치지 않는다는 신호다.
여기서 한국 기업이 가져갈 시사점은 ‘AI를 도입하라’가 아니라 ‘도입하기 전에 무엇을 재발명할지 먼저 물어라’에 가깝다. 어떤 도구를 살지보다, 우리 업무 중 어떤 것이 기존 시스템의 관성 때문에 그 모양으로 굳어졌는지를 가려내는 일이 먼저다.
사노피가 그랬듯 그 출발점은 대개 데이터다. 부서별로 흩어진 데이터를 한곳에 모으지 않으면 재발명은커녕 개선조차 어렵다. AI 답변의 정확도와 신뢰도는 결국 잘 통합된 자체 데이터에서 나온다.
지금은 기업이 AI로 일하는 방식을 다시 정의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시기다. 기술은 충분히 무르익었고, 가장 보수적인 산업조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질문은 각 기업이 AI를 기존 업무를 다듬는 도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업무 자체를 다시 설계할 기회로 볼 것인가다.
그 선택이 향후 몇 년의 격차를 가를 것이다.